친구가 '지연 너 진짜로 죽지 마라' 라고 했다. 

나는 '왜?'라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가 '왜라고 하지말고 알겠다고 해야지. 다음에 다시 물어볼게. 그때 알겠다고 해.' 라고 했다. 

'그냥 알겠다고 해'

 

참. 왜냐고 되묻는 게 이상하긴 해.


 

친구가 '행복해보이던데' 라고 하길래,

나는 '찰나야, 나날이고 싶은데'라고 했다. 

 

친구는 좋은 표현이라고 이런 거 기록해두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웃기는 애다. 


 

내가 '속상하다'고 하니,

친구는 '내가 아는 너는 속상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몽하는 사람인데, 왜이리 지쳤나.' 했다. 

 

그러게. 나다운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 

 

 

 

 

쿨쿨이(조울증)때문이려나 기본적으로 생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나 기대를 별로 하지 않기도 한데 

남들이 흔히 말하는 '현타'를 맞으면 자살 충동이 세게 올 때가 있다.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마치 나는 컴퓨터고 누가 나에게 명령어를 입력한 것처럼 내 생각을 내가 통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만히 놔둬도 혼자서 알 수 없는 글씨들이 써지고 지워지며 검은 화면이 채워지는 프로그래밍 코딩 화면 마냥 죽고 싶다는 생각과 어떻게 죽을 것인지 등등의 생각이 빠르게 와르르르 지나간다. 

 

마치 아주 쎄게 처 맞은 기분이다. 

보통은 헛짓거리하다가 '정신 차려!'일 텐데, 나는 살아보려다가 '그냥 죽자!'가 된다.

 

최근 그 빈도가 잦아졌다. 버릇인가 싶을 정도로. 

버릇처럼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또 은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 거 같기도 하고....

 


 

번개 맞은 것처럼 강한 자살 충동이 왔을 때 대처하는 루틴을 만들었다.

딱히 만든 건 아니고, 이렇게 해보니 효과가 좋아서..루틴이 되었다. 

 

STEP1. 빠르게 옷을 챙겨입고 찬바람을 쐐러 나간다. 
STEP2. 흥분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줄담배를 피운다. 
STEP3. 엘레베이터나 화장실 거울을 보며 내가 얼마나 예쁜지 생각한다. 
 - 그리고 살면서 만난, 영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잘먹고 잘사는 인간들을 떠올린다. 
STEP4. 자살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묵주기도를 한다. 

 

 

이대로 하면 꽤 빠르게 잦아들더라....

그니까.... 담배는 내 치료제라고........... 


 

가장 버림 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어제 꿈에 대한 글을 썼다. 

꿈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였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건 살면서 처음인 것 같은데.

 

어릴 때부터 교사라는 꿈을 꿨지만, 

- 내가 교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아주 이상적이다. 좋은 사람들을 길러내서 세상이 나아지는 데에 기여하고 싶어서 교육자가 되고 싶었다. 어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그 분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만 영향이 미치지 않는 영역도 많을 것이다. 교육자는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발전을 도모하는 사람들,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 매일을 보다 아름답게 꾸며주는 사람들 모두가 성장하는 데에 크고 작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흙이나 거름 같은 거라고.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던 것인가? 생각해보면 갸우뚱하게 된다.

 

사실 고3때 잠깐 한눈 판적이 있었다. 

내가 고2에서 고3 지낼 때 즈음에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 이제 막 1세대 유튜버들이 활동을 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때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튜브에서 센세이셔널한 히트를 쳤는데,

'이거다!' 싶었다. 

영상을 하고 싶었다. 편집이든 연출이든 뭐든. 영상의 시대가 오는구나 싶었다. (근데 나 좀 선견지명 있는 거 아닌가 데헷)

그래서 수시 6장의 티켓을 전부 미디어 관련 학과로 지원했다. 

 

그런데!! 수능 성적이 너무 잘 나와버린 것.

찍은 거를 다 맞아서 (ㅋㅋㅋ) 담임 선생님께서 입시 상담해주실 때 재수해도 절대 이 성적 안 나오니 무조건 안정지원해서 이번에 가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음...

당시에는 뭐 정시 성적이 좋으면 수시에서 납치당한다 어쩐다, 이런 얘기가 있었어서.... 

평소에 모의고사 보면 어영부영 맨날 재수하겠다고 징징대던 애가 꽤나 선방을 하니,

부모님께서 갑자기 내 대학 진학과 전공을 정하는 데에 크게 관여를 하기 시작했다. 쩝,,, 

그러면서 영상은 여자가 하기에 너무 고생스럽고 잘못하면 배 곯기 딱좋다며, 여자 직업으로는 교사가 최고라며, 사범대 지원을 종용하셨고, 그래서 어찌저찌 수시 지원했던 학교들의 논술 시험은 치루러 가보지도 못하고 사범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사범대는 자격증이 나오는 학과이기 때문에 필수로 들어야하는 전공 필수 과목, 전공 기초 과목 등 필수 이수 학점이 어마어마하고, 

여기에서 한눈 팔기란 참 쉽지 않다. 

복수전공을 한 아주 소수의 동기들은 추가학기는 기본으로 다니는 듯 했고, 대부분의 동기들은 8학기 칼졸업 후에 임용고시를 준비하였다. 

- 임용고시는 졸업예정자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취업을 준비하는 다른 과 학생들처럼 졸업 유예는 보통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쉬고 싶어서 1년 휴학을 하기는 했지만, 역시나 8학기 칼졸업 후에 임용고시를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다.

 

사범대의 환경이나 주변에서 '공무원이 최고지.' 라는 말이나, '여자 직업으로는 선생님만한 게 없다.'라는 말이나, 부모님의 기대 등으로

나는 그저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길이 있어서.

그리고 그 길이 너무 넓고 명확해서 머리 아픈 고민도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발길을 옮겼던 것 같다. 

 


 

 

곧 복직을 하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만약 또 아프게 된다면 아마 면직하게 되겠지.

 

사실 끝까지 잘 해낼 거라는 확신보다, 

관두기 영 아까운 이 직업을 내려놓기 위한 정리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그동안에는 이 일은 그만한다면 '나는 어떤 일을 업으로 삼고 살까' 참 고민이 많았다.

돈벌이도 그렇지만, 사람에게 '일'이란 먹고 사는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건 누구의 삶을 들여다 보아도 그렇지 않을까. 

살아가는 데에 성취와 동기, 철학, 자아와 성격의 형성에도 스며드는 것이 업이다. 

 

교사를 그만둔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어? 라는 질문에 

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냥 알바' 라고 답했었다. 머리 안 쓰고 시키는 거 몸 써서 열심히 하면 먹고 살수 있는 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그러다 문득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책방이다. 


 

 

책방을 운영해보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니 신기하리만치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한쪽에는 책을 팔고, 한쪽에서는 커피와 술을 마시며 독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 

 


 

 

책을 파는 공간의 이름은 [구멍책방]이라고 할 것이다. '구멍가게' 의 소박한 느낌을 데려오고 싶어서. 

 

[구멍책방]에는 내가 큐레이팅한 책을 팔 것이다. 

나는 책을 고르고 읽는 취향이 꽤나 확고하고,

동묘에 쌓여있는 헌 옷을 뒤져 특별한 아이템을 얻겠다는 패피의 마음으로 (ㅋㅋㅋ) 베스트셀러가 아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책을 알라딘 등을 싹싹 훑어 찾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모아보면 카테고리를 나누기에 나쁘지 않고, 

그동안 주변인들에게 책 추천을 해왔던 바로는 내 취향이 꽤나 대중적이라서 내가 골라오는 책들이 장사를 하기에도 너무 마이너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나는 여가독서를 즐긴다. 

자기계발서 같은 건 읽지 않는 편이다. 독자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살아야 한다.' 하는 책들은 사양한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요즘 같은 도파민 중독시대에...!!  

'여기서 산 책들은 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는 것 같아.' 라든지, '이 책방 사장님 취향이 좀 웃겨' 같은 소리를 들을 만한 그런 책들을 모아다가 팔고 싶다. 

독서는 항상 지루하고, 마음을 먹어야하지만 건드릴 수 있는 - 여가보다는 생산에 가까운 활동이라는 오명을 벗길 바란다. 

 


 

 

[구멍책방] 옆에는 커피 혹은 차, 술을 마시면서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한다. 

책방에서 구매한 책을 읽어도 되고, 자신의 책을 가져와서 읽어도 되고. 

맨몸으로 온 사람도 자연스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한쪽 구석 책장에 자유롭게 가져다가 읽을 수 있는 책들을 꽂아둘 것이다. 

 

음료의 종류는 아주 적게. 주인공은 음료가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주전부리는 필수다. 

책은 정적인 활동이니까, '가사가 없는' 음악과 손이나 입이 심심한 사람들을 위한 간식거리들을 준비해 두어야 겠지.

 

책 냄새와 적당한 조도의 조명. 편안하지만 졸리지 않는 분위기. 

지나치게 무겁지는 않지만, 붕 떠있지도 않아서 각자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어수선하지 않은 공기. 

산만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지루하게 단조롭지도 않게 공간을 꾸미고 싶다.

 

이 공간의 이름은 [광장 (아고라)] 라고 할 것이다. 

책을 사는 곳은 작은 구멍가게일지라도, 책을 펼지는 순간 '광장'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아고라'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 

아고라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에 형성된 광장으로, 그리스인들은 이 곳에서 민회와 재판, 상업, 사교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아고라(Agora)’라는 말은 ‘시장에 나오다', ‘사다’ 등의 의미를 지니는 ‘아고라조(Agorazo)’에서 비롯된 것으로 ‘시장’의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아고라가 시장의 기능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시민들의 일상 생활의 중심이 되면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나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아고라 [agor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대학시절 시 창작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아고라'를 광화문 광장과 엮어서 시를 쓴 적이 있다.

모든 말들이 모이는 곳. 

광장에는 온갖 말들이 모인다. 그게 옳든 그르든. 같은 생각이든 다른 생각이든. 한 명의 말이든 여럿의 말이든 말이다. 

 

아주 흔하게 책을 펼치면 다양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한다. 

[광장 (아고라)] 는 개인이 책을 읽어서 광장에 나서는 의미도 될 것이고, 또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뜻도 있다. 

 

종종 그곳에서 약간의 취기를 곁들인 독서 모임을 운영하고 싶다. 

책 속의 세상과, 책의 내용이 스며든 나의 세상을 이야기하고, 책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어떤 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타인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광장 같은 모임을. 

 

그리고 책장에 있는 책에는 자유롭게 메모를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내가 책을 사서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매모'하기 위함인데. 

책을 읽는 버릇 중에 하나가 '댓글 남기기'이다. 

책을 읽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옆에 적어두거나, 웃기면 그냥 'ㅋㅋㅋㅋ'이렇게 적어두기도 한다. 

 

내가 낙서/메모하며 읽은 책을 누군가가 또 읽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달고, 또 그것을 다른 이가 보고 나도 보고. 그렇게 방명록처럼 댓글이 쌓인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광장(아고라)]의 책장에 꽂힌 책들이. 그런 생각들을 모아주면 좋겠다. 재밌는 부분은 sns에 올려도 좋고! 

 

 


 

[구멍책방]과 [광장(아고라)]를 가진 이 책방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으면 좋을까?

가게 이름 짓기는 아주 천천히 생각하며,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나의 설렘으로 남겨두겠다. 이 책방을 여는 그날까지. 

 

'너는 꿈이 뭐야?'

 

꿈이 무어냐는 질문.

맞춤법도 제대로 못 지키는 코흘리개 어린 나이부터, 책상과 거울 앞에서 한세월 보내는 학창시절, 그리고 내일이 토요일이라고 금요일 밤을 기다려 술에 취하는 청춘까지 

평생을 달고 사는 질문이지.

 

어릴 때는 '꿈'을 '장래희망'과 동일한 의미라고 착각했다.

나는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악기를 관두고 나서는 '판사'(ㅋㅋㅋ), 머리가 좀 커서 내가 받을 수 성적과 실현 가능성 같은 걸 고려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국어교사'가 꿈이라고 대답하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새내기 시절, 우연히 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무슨 과였는지,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는지, 이름이 뭐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선배가 나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스무살의 나는 어김없이 '존경 받는 국어 교사' 정도로 답했다.

그러자 선배가 그것은 '꿈'이 아니라고 했다.

 

선배는 '목표'와 '꿈'은 다른 것이라고.

그것은 꿈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고, 그 수단을 쟁취하기 위한 목표가 될 뿐이지.

직업이 '꿈'이 될 순 없다고.

 

꿈이란,

'어떤 삶을 살아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와 같은 개념이라고 했다.

내가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국어교사'가 된 순간, '꿈을 이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오랜시간 나의 '꿈'을 계속 생각하며

그 꿈에 다가갈 수 있는 수단들을 떠올리고, 크고 작은 목표를 이루어 나가면서 천천히 가까워 지는 것.

그리고 눈 감는 날까지 그것을 지키기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영감과 동기를 주는.

그런 것이 '꿈'이라고 했다. 

 

선배의 말에 크게 공감했었다. (막 대학생이 된 나는, 이게 성인의 깊이인가-하고 감동했었던 것 같다...ㅋㅋㅋ)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아이들을 교육할 때에도 '꿈'과 '목표'는 다른 것이라고 일러둔다. 

 

단시간 내에 닿을 수 있는 목표를 꿈과 착각해 버리면, 

그 목표에 다다랐을 때 허무해버릴 수 있다.

내가 어떤 시험에 합격해서, 어떤 직업을 얻게 되어서, 이만큼의 돈을 모아서 - 이런 것들을 '꿈'으로 착각하고 살았다면, 

그다음은 뭐가 있지?

삶을 살아갈 때, 하나의 주제로 이어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가 어려워진달까.

 


 

 

스무살의 나는, 한참 고민한 끝에

'감사하고 본받을 만한 어른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때는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기억에 남는 교사이고 싶었나 보다. 

 

글의 서두에 '꿈이 무어냐'는 질문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듣는다고 했는데,

그래서 

지금 나의 꿈은 무엇인가? 하면.. 스무살의 지연이가 가졌던 꿈을 아직도 품고 있는가? 하면... 

그럴리가! 

 

나는 꿈이 없다. 

여기에 '아직'이라는 수식을 붙이겠다. 

 

나는 '아직' 꿈이 없다. 

그러니까, 

취준생 같이 나는 꿈준생이라고 하련다. 

 

'꿈'이 눈 감는 날까지 마음에 품는 것이라면,

나에게 아직 '꿈'을 준비(?)할 시간이 너무 많잖아. 그래서 이대로 살아보련다.

살다보면, 

기대하지 않은 날에. 조용히 올 수도 있겠지. 

 

애인은 아주 이른 새벽,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인지 한밤중인지 경계가 애매한 새벽 4시.

매일같이 누구보다 빨리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내가 눈을 뜨기 전, 그러니까 아침이 오기도 전에 그날의 첫 메시지를 남긴다.

 

나의 병에 '쿨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며칠 후였나, 어김없이 04시 56분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지연, 새벽아 춥다 따듯하게 자 사랑해 

 

'새벽아' ?

오타였을까? '새벽 아침'이라고 치려고 했던 걸까? '새벽이 춥다'고 하려던 걸까?

마치 나를 '새벽'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 그 우연한 오타에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내가 만약 '새벽' 같은 사람이라면, 

나의 병인 '쿨쿨이'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쿨쿨이'보다 먼저 일어나서 '나'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새벽의 시간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연인지, 운명인지

어쩌다가 '새벽'이라고 불린 나는, 그게 나였으면 했다. 

 

그래서 그에게 나를 '새벽'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였다. 

 

고요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는, 밝은 빛도 따스한 햇볕도 없는 차가운 밤이 아니라 

아침을 기대하는, 모든 생명이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오늘 하루의 남은 시간을 향유하는

그런,

새벽을 사는 사람이고 싶다. 

 

 

 

'이름'은 대상을 다른 것들과 구별 지어 준다.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것을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특정한 하나의 존재로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시,

김춘수의 <꽃>이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김춘수의 <꽃> 중에서

 

 

또 많은 문화권에서 이름을 짓고 부르는 행위는 대상에 대한 지배력의 행사를 의미한다. 

 

소설 <해리포터>에서 악인 볼드모트는 너무 두려워서 그 이름을 부르기 조차 무서운 존재로 표현된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구마사제는 악마의 이름을 알아야 인간의 몸에 들어간 악마를 내보낼 수 있다. - 김범신 베드로(김윤석)가 이영신(박소담)의 눈을 가리고 이름을 반복해서 묻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일본의 만화 <데스노트>에서 상대의 이름을 알아야 죽일 수 있다는 설정도 비슷한 맥락이다. 

 

 


 

 

 

최근 양극성 장애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깊게 새겨진 내용은 

조울증은 완치의 개념이 없고, 평생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외래를 볼 때도 가끔 교수님께 '나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러면 항상 되물으셨다. '낫는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냐'고. 

들었던 답변은 약은 평생 먹어야 할 거고, 약을 먹어서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가 낫는 거라 생각하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병과 죽는 날까지 함께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병을 싸우거나 극복해야하는 대상으로 삼으면 참 고달프겠구나, 병을 미워하면 정말 괴롭겠구나 싶었다. 

 

주변에서 종종 나에게 '이겨내야지'라는 표현을 한다. 

내가 조울증을 평생 앓는다면, 과연 이겨낸다는 건 뭘까? 나는 지금 싸우고 있는 건가? 그럼 지는 것도 있는 걸까?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 같은 마음으로 병을 대하기로 했다. 

병을 혼쭐내주고 말 안 듣는다고 원망할 게 아니라, 

어르고 달래고... 우쭈쭈 해주고....... 얘도 괴롭지 않게 달다구리도 사주고 그러면서 같이 살아보려고...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보호자와 이야기할 때에도 귀여운 이름을 지어 병을 부르면,

매번 본인이 환자고 질병을 달고 있다는 인식을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내 조울증의 이름은 '쿨쿨이'로 지었다. 

어릴 때 보던 만화 <방가방가 햄토리>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 항상 양말 속에 들어가서 잠만 자는 햄스터 캐릭터가 있는데, 그 캐릭터의 이름에서 따왔다. 

 

너무 날뛰지 말고(?) 잠이나 자라는 ,,,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다. 꽤나 귀여운 듯? ㅎㅅㅎ

- 그리고 ,,, 기면증까지 있는 나의 병에게 꽤나 적절하다.

 

이건 딴소리인데, <방가방가 햄토리>는 주인이 외출했을 때 햄스터들이 철창을 탈출(?)해서 어디 무슨 나무 밑에 지하 같은 데에 모여가지고, 노는 그런 스토리의 만화인데.... 으른이 되어서 생각해보면 햄스터는 수명이 1.5년~2년정도라고 하던데.. 그들의 스토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나....

 

 

아 참, 그리고 우연히도 오늘이 햄토리 쿨쿨이 생일이더라! 축하해 ㅎㅅㅎ


 

 

쿨쿨아, 잘 부탁해! 

 

 

참 오랜만에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계기가 다소 지저분하여 유감이지만, 이 기막힌 감정을 뚫어낼 곳이 달리 없기 때문에 글에다 쏟아내고자 한다. 

 

꽤 오랜 기간 병을 앓으면서, 또 나의 병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면서

사람들이 정신병(특히 우울증과 조울증의 차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또 안일하게 결론짓는지... 형언하려면 한 세월이다.

아픈 당사자로서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그것-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그래서 어떤 고통을 겪고, 일상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역할은 나 자신이다.

매일같이 '왜 살아야하는 걸까?' 라는 의문을 가지며 삶의 회의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나의 아픔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 지치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돼?'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2024년 겨울 이후,

나는 한 종교의 청년회에 속해 활동하고 있었고, 청년회 안에서 서로 취미가 맞는 사람끼리 만든 소모임에도 여럿 들어가 있었다. 

( 나는 모태신앙이다. 청년회 활동은 형제-오빠의 권유로 하게 되었다. 오빠는 당시 병세가 악화되어 무기력하게 지내던 내가 청년회 활동을 통해 동네 친구와 취미 활동도 하고, 함께 기도도 하며 우울감을 희석시켰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한다.) 

 

그 해 여름날,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청년회 단톡방에서 메신저상으로 어떤 두 청년이 의견 다툼을 하게 된 것. 대략 종교적인 내용이었다. 

편의상 두 사람을 각각 '열매'와 '마리'라고 하겠다. 

 

열매와 마리는 전체 청년회 단톡방에서 다소 날선 말을 몇 차례 주고 받았고, 열매는 곧 단톡방을 나가버렸다.

( 사실 열매는 종종 그랬던 사람이다. 청년회 활동을 아주 오래했지만, 와중에 자신이 기분이 나쁘면 단톡방을 나가고 또다시 초대받는 일을 으레 반복했던 사람이다. )

 

전체 단톡방을 나간 열매는 소모임 단톡방에서 마리의 뒷담화를 시작했다.

이때 열매가 마리를 욕하며 쓴 말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흔하게 쓰이는 표현이면서도, 혐오적인 의미를 가득 담고 있는 저급한 표현이었다. 

 

" 정신병이 틀림 없는 듯 " 

 

 

'정신병이 틀림 없는 듯', '정신병이 틀림없는 듯', '정신병이 틀림없는 듯', '정신병이 틀림없는 듯'........ 

맥락상 누가 보아도 열매는 '정신병'에 혐오적인 의미를 담아 사용하고 있었다. 

 

( 마리는 꽤 중증으로 우울증을 앓은 경험이 있고 또 그 단톡방에는 현재진행형으로 중증 정신병 환자인 나도 있었다. 마리의 병력을 열매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일상에 지장이 있을 정도(휴직 등)로 중증 정신병 환자라는 건 열매도 알고 있었다. )

 

열매가 자신의 화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올바름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되는 대로 뱉은 말이었겠지.  

 

안타까운 건 해당 소모임 단톡방에 마리도 있었다는 것. 

( 마리가 단톡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열매는 마리가 없는 것으로 착각했다. )

마리는 차분하게 열매에게 다시 반박하는 메세지를 보냈고, 열매는 소모임 단톡방도 나가버렸다. 

 

열매가 나간 후, 나는 곧바로 해당 소모임 단톡방에 '정신병에 혐오적 의미를 담아서 쓰지 않았으면 한다' 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이 사건에서 상처를 받은 건,

당사자인 마리는 물론이거니와 실제 중증 정신병 환자인 였다.  

 

오늘을 죽느니 사느니 하는 나의 고통과 아픔이 다른 이에게는 모욕으로 쓰인다니.

정신병.. 정병..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정신병이라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 걸 직접 보니, 진짜 정신병자-나는 참으로 비참했다. 

며칠을 얼마나 울었을까.

나는 당사자도 아닌데. 내가 욕을 먹은 당사자도 아닌데, 자꾸만 슬퍼서 눈물이 샜다. 

 

오빠와 청년회 임원들에게 마리와 나의 이야기를 전달하였고 

여러차례 열매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열매는 끝내 나에게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 이때 열매가 마리에게는 개인적으로 사과를 했다. 나에게 사과하는 일에 대해서는 '정신병'이라는 말을 나에게 직접한 것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해야 하냐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전해 들었다. )  

 

우리 가족(나와 오빠, 새언니)은 내가 열매의 사과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이런 기분으로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청년회를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러자 청년회의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극구 말렸다. 나가지 말라며, 열매가 사과하도록 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어른들까지 애쓰시는 정성스러운 설득에.. 우리는 열매의 사과를 기다리며 청년회에 남았다. 

 

 

그게 2024년 여름이었다고 했지? 

해가 바뀌고, 2025년 1월이 되어서도 나는 사과를 받지 못했다.

열매는 본인이 청년회를 나가면 될 거라며, 청년회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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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사고가 심해져 11월말경 ECT(전기경련치료)를 받으러 입원했던 나는 청년회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 세번째 받는 시술로 유지치료 목적이었는데, 4회를 받았으나 그전만큼 효과를 보지 못했다. ) 

어영부영 무기력하게 지내던 나는 해가 넘어가고 1월 2일, 술을 먹고 처음으로 자해를 했다.

상처가 꽤 심했다.

애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약을 발라 주었고, 나에게 먼저 같이 기도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

 

그렇게 애인 손을 잡고 기도를 드리러 간 그날, 나는 그 사건 이후 처음으로 열매를 보았다. 

모르는 척 했다.

그냥 모르는 척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려던 참이었다.

새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을 듣자 하니 열매가 어물쩍 청년회 식사자리까지 왔고, 그것을 본 오빠가 식당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는 것. 

 

언니와 오빠는 나에게 '신경 쓰지 말라'며 푹 쉬라고 하였고, 

알겠다고 하며 괜찮은 척 전화를 끊은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에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차에 시동을 걸어 곧장 열매가 있는 청년회 식사자리로 돌아갔다. 

( 내가 화가 났던 이유는 열매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불쑥 식사자리에 나타난 것이, 그 자리에 있던 자신 때문에 애쓰고 속썩었던 사람들을 무시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오빠가 있었고, 오빠가 식사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 나는 분노했다. 혈육이라고 과하게 편드는 것이냐, 싶기도 하겠지만 오빠는 누가 보아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정도로 청년회에서 상당히 맡은 역할이 크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다 )

 

--

 

 

운전대를 잡고 '흥분하면 안 돼'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열매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쌍욕이었다. 

화를 내는 나에게 열매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싸우러 왔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달려드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 상황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고 했다. 

 

분명 열매는 나에게 잘못을 한 사람이었고, 나는 사과를 받아야하는 사람이었는데? 

 

누군가에겐 죽을병이, 누군가에겐 웃긴 상황이 되는 거지. 

누군가에겐 죽을병이, 누군가에겐 일방적으로 화낼 만한 것도 아니라 투쟁해야 하는 일인 거지. 

 

 

--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열매를 불렀다. 

열매는 '나부터 얘기할까?' 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매는 당시에 나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었다고 한다.

분명히 사과한다는 뜻을 전하였으나 여러 사람을 통해 말이 오고 가면서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하였는데,

아직 사실관계는 알 수 없다.  

 

열매가 '정신병'을 욕으로 사용하고,

상처를 받은 나는 당시에 오빠를 통해서 내 이야기를 전달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오빠의 권위와 권력 뒤에 숨어있는 여동생과 여동생을 대변하느라 일을 크게 벌이는 오빠의 모습으로 비쳤나 보다. 

나보고 열매에게 직접 기분 나쁜 걸 이야기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걸 설명하며

내가 슬프다고 호소하고 애쓸 바에, 나는 번개탄과 청테이프를 주문하는 조울증 환자라고 대답하고 싶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는 당연한 건데. 나를 피해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2025년 1월 5일, 

불쑥 청년회 모임에 나타난 열매에게 어찌되었든 나는 사과를 받았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열매가 나에게 사과를 하며 했던 말이 머리에 맴돌아서. 

열매는 변명을 하듯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도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고, 지금도 계속 먹고 있어

 

 

정신병을 비하할 의도는 없었고, 그저 욕을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런데 내가 상처받을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열매 본인도 우울증 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 본인도 정신병을 앓고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는 의미로 한 말 같았다. 

 

이 말이 내 머리에 계속 맴돌았던 이유는

내가 이런 말을 듣는 이유가 뭘까? 계속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고,

묘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계속 짱구를 굴리던 끝에 이제 명확히 말할 수 있어서 이곳에 기록해 두려고 한다. 

 


 

 

1. 나는 양극성장애(조울증)이다.

2. 조울증은 우울증과 다른 질병이다.

  - 예를 들면, 조울증은 항우울제를 처방하여 치료할 수 없다. 

  - 그러니까 급체를 하든, 장염에 걸리든 구토를 하겠지만 소화가 위에서 안 되는지, 장에서 안 되는지는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 조울증과 우울증 모두 우울 삽화를 경험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혀 다른 병이고. 치료 방식이나 증상 양상 등도 매우 다르다. 

3. 우울증을 '진단' 받은 환자와 단순히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먹는 환자는 다르다. 

  - 요즘 소화가 잘 안 되어서 소화제를 처방받아 먹는 환자나 카베진을 챙겨먹는 사람과, 위염이나 위암에 걸린 사람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

  - 정신과는 환자와의 말을 통해 임상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단을 받으려면, -그러니까 의사의 진단서를 받거나 하려면- 최소 3개월정도는 꾸준히 내원하며 치료를 받아야 한다. 

  - 감정 혹은 수면 등에 문제가 있어서 항우울제, 수면제 등을 처방받아 복용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우울증 환자인 것은 아니다. 단기복용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동안 내가 어떤 동력으로 살아왔는지,

남들은 왜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자살이 왜 금기시되는 것인지,

나는 죽고 싶은데, 왜 나의 생과 사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인지 매일 생각하고,

 

참 뭐랄까..

살기도 귀찮고, 죽기도 귀찮은 나에게

- 이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살기도 귀찮고 죽기도 귀찮음. 

 

열매의 말은

웃겼다.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얼마나 무지한지. 

열매가 우울증 환자인지 기분이 일상에 얼마나 지장을 주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알 바도 아닌 게 실제 우울증 환자라면 저런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니까 약간 이런 거지.. 죽네사네 투병하는 암환자한테 -예를 들면 간암 환자한테, 자기도 간장약 챙겨먹는다는 거랑 같다고. 

 


 

 

정말로 나와 비슷한 투병 경험이 있어서, 마음으로 공감해 주는 친구도 만났었다. (사실 그게 마리임..ㅋ) 

그런 친구의 위로와 관심은 나에게 아주 큰 용기가 되기도 했고

-정신질환 환자는 심리적으로 방어적이고, 무기력한 경우가 많아서 ... 도움에 '부응'해야한다는 부담을 주지 않고, 다가가는 것은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데,  마리는 그 선을 잘 지키며 다가와 준 유일한 친구.  

나에게도 그런 친구는 잘 자라고 있는지 종종 확인하는 화분이 되기도 한다. 

 

우울증은 많이 알려져있지만,

양극성장애(조울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서점에도 보면 조울증과 관련한 내용은 우울증에 대충 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조증 삽화를 한번이라도 경험하면 양극성장애로 치료 방향을 바꾸는데,

그래서 내가 입원했던 병동에서 만난 환우들은 다수가 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우울증보다 조울증이 더 수가 많은 듯 보였다. 

 

 

정신과 질환은 뭐 어디 잡고 쓰러지거나 앓아눕는 병이 아니니까 

sns를 하거나, 약을 먹으면 어느 정도 살아서(?) 연애를 하거나, 사회생활도 좀 하거나 이러면 별로 안 아프다고 대충 확증편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정도 살아서 움직이는 것도 참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주변에서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좀 봐달라, 나는 아프니까 배려해달라 이런 엄살이 아니라,,, 아픈 척하며 병을 무기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진짜 마음처럼 안 되는 게 마음이라

 

추천의 글과 관련하여

현 평가 방법에 대한 우려의 의견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동의한다. (아래 문장은 글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가) 비판적 창의력과 같은 역량은 객관식 지필 평가로 평가하기가 여렵고, 관찰 보고서와 같은 과정 평가, 수행평가가 적합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객관성을 의심받고 있다. 

  (나) '공정함'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느냐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해 볼 시기이다. 수능은 학생이 결과를 어떠한 방식으로 얻었는지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에 학습 과정을 평가한다는 면에서는 가장 불공정한 평가로 볼 수 있다. 

  (다) 2015 개정 교육과정부터 강조하고 있는 교육과정-수업-평가의 일체화를 실현하기에 객관식 평가와 수능은 걸림돌이다. IB는 다른 방향에서 내신과 입시를 바라보게 하는 대안으로서 가치가 있다.

 

동의하지 않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색이 입혀진 문장은 동의하지 않는 이유이다.  (아래 문장은 글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가) 혁신 학교를 활용하면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교육 목표와 수업 방법을 세계에서 인정하는 수준으로 설정하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IB를 도입해야 한다.

  : 글로벌 인재를 기르는 것은 중요하지만, 한 나라의 국가 교육과정까지 세계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교육 목표나 수업 방법 등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문화에 맞게 구성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왜 우리만의 새로운 교육과정을 꾸려보지도 않고 IB라는 틀 안에 욱여넣으려고 하는 걸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사대주의 같다)

  (나) IB 학교의 수업 목적 또한 학생들이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다.

  : 이 책에서는 IB가 입시를 하는 데에 얼마나 좋은지를 상당히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교사들을 설득시키기엔 적절하지 않다. 교사는 평가를 결과로 보지 않는다. 평가는 학생의 학습 정도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다. 공교육에서는 특정 시험의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수업의 근본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글의 본문과 관련하여

의문이 생기는 내용을 정리하고, 질문을 달아보겠다. 내용을 반대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물음이니.. 오해하지 마시길..ㅎ

서구 선진국은 대부분 전 과목에서 대규모 논술형 대입 시험을 치른다. 그래도 채점의 공정성 문제 없이 수십 년간 잘 운영해 왔다. 
.... 더욱이 이들 국가의 고등학교에서는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 교육이 가장 정상화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입시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입시 위주의 교육은 공교육 정상화 및 내실화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가) 전 과목 논술형 대입 시험을 채점의 공정성 문제 없이 수십 년간 잘 운영해온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가? 채점관, 기준, 절차 등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하다. 

 

  (나) 입시는 아무리 좋아도 결국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데, 입시 위주의 교육이 공교육 정상화 및 내실화를 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동일한 의미'는 논리적 비약 같음...

  IB도 결국엔 '점수'가 부여되던데. 점수를 결과로 보여주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이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을까? 

 

  (다) 서구 선진국에서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평가하는 게 옳을까? 대학 진학에 대한 나라별 태도는 고려한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을 많이 시키는 것 대신 서구는 비싼 사립학교를 보내 대입을 준비하는데, 이것이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내용은 아닐까? (프랑스 바칼로레아를 조금만 검색해보면, 고득점 학생이 많은 학교들은 사립학교가 대부분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라) 입시 위주 교육(-논술형 입시)으로 인성 영역, 다중 지능에 대한 교육과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채점 기준이 있는 한 결국은 점수를 잘 받기 위한 글쓰기 형식이 되지 않을까? 

  

  (마) 학습자가 어느 정도 수준의 글을 쓰는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 책을 아무리 읽어봐도, 교육과정을 모두 마쳤을 때 학습자에게 요구하는 기본 지식 수준이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쓰기의 수준/ 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한국어 IB디플로마의 질 관리를 위해, IB본부에서는 디플로마의 필수 요건인 6개의 선택교과와 3개의 필수 교과 중 2개의 선택 교과를 영어로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정책을 제시한다. ... 교육청이 IB본부와 합의할 때 이 부분을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는데, IB 본부에서는 어차피 영어 과목은 영어 시험이고 이를 준비하며 영어로 장문의 에세이를 쓰고 말하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한 과목 더 영어로 시험 보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고 반문했다. 

IB 학교 출신들은 수시 전형에 지원하고 있는 IB 최종 점수는 1월 초에 나오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수시 일정과 맞지 않다. 현재 제주 교육청과 대구 교육청에서 추진하는 것은 IB 최종 점수가 아니라 IB 식으로 본 고사의 내신 점수와 과세특을 기록한 생기부에 기반하여 학종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가) 이제 막 한국에서 IB 교육을 도입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학습부담과 지원할 수 있는 대학 입시 전형에서의 제한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IB 교육과정을 진행한다면, 현재 한국 대학에서 요구하는 고사 성적도 따로 학교에서 마련해야하고, IB 디플로마 취득 및 점수는 수시 전형에 반영하기에는 성적이 시기상 늦게 나오는데,

  대입을 위해 학교 교육과정과 별개로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하는 학습자의 부담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길이 나 있다고 해서 좁아터진 가시밭길에 아이를 밀어 넣을 수는 없다. 대학 입시 전형이 IB교육과정을 상당 부분 인정해 주지 않으면, IB를 해보려는 학교- 교사와 학생- 모두 과도한 학습량과 업무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 책에 실린 학생의 인터뷰에는 공통적으로 학습과 과제량이 너무 많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한 인터뷰 내용은 학습 부담 증가가 단순한 우려가 아닌 결과로 이미 나타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나) IB 학교에서 실시하는 프로젝트형 평가나 소논문 등의 좋은 교육 프로그램만 선택하여 반영하고, 우리나라 상황에 맞는 입시 제도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도 되는데... 왜 꼭 IB를 대대적으로 도입해야할까? 

  이 책에서도 결국에는 한국형 바칼로레아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IB가 필수적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아래 내용과 관련해서는 조금 감정이 실렷슴..)

우리 교육 문제의 가장 큰 범인은 단언컨대 공교육이다. 우리 공교육은 사교육을 받을수록 유리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학교 시험도 인근 학원 @@교 내신반에 다니면 더 유리하다. 왜 학교에서는 시험 문제를 학원들이 예측할 수 있게 낼까? 

 

  (가) 교육에서 '유리'하다는 말이 성립하는 명제인가? 높은 점수를 받는 데에는 유리할 수 있으나, 공교육의 결과는 점수로 나타나지 않는다. 공교육의 결과를 전인적 성장의 측면에서 보았을때 실제로 사교육을 받을수록 유리한 구조인가? 

 

  (나) 학교 시험이 인근 학원 @@교 내신반에 다니면 더 유리하다는 주장은 어떻게 도출된 거지?

  교사들이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시험 문제를 학원이 예측할 수 있도록 내지 않는다. 수업을 듣지 않으면 시험에서 고득점할 수 없게 수업을 설계하고 문제를 출제한다.

  교과서의 내용을 재구성하거나 외부지문으로 수업하는 선생님들이 상당히 많다. 교사를 머라고 생각하는겨 장난하나; 

  그리고 교사는 수업하고 문제만 내는 게 아니라 생활교육도 하고 행정업무도 한다. 맨날 단위 학교에서 낸 학습지와 문제들을 뚫어져라 분석하고 학생들에게 양치기로 문제를 잔뜩 풀어대도록 하는 학원이랑 어떻게 비교를 할 수 있지?   

 

  (다) 우리 교육 문제의 범인을 공교육이라고 단언하는 경솔함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우리 교육 문제의 범인은 하나의 단어로 간단히 말할 수 없다. '공교육'이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는 근거는?

  만약 그 근거가 사교육을 받을 수록 유리하게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면, 국가 교육의 목표/결과에서 학업 성적은 아주 일부라는 것은 현재 국가교육과정 문서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나는 내 교육을 통해 싸가지 없고 아는 것 많은,  글 잘 쓰는 인간보다 ...  조금 아는 것이 적고 표현은 잘 못 해도 남을 배려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키워내고 싶다. 

  이 글을 통해 우리 교육 문제의 범인에 또 누구있는지 알 것 같다.

  이런 글을 펴내는 사람들은 교육계의 담론을 형성하고 체계를 바꾸는 데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일텐데... 안타깝다. 

 


 

또 쓰다보니 길어져서 다음 글에서 이어서 쓰겠다...

 

일단 IB가 입시제도를 바꾸자는 것인지, 교육과정을 바꾸자는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고,

 

무엇보다도 학습자의 사고를 꺼내도록 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IB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

왜! 하필!! IB 인지! 

IB의 불편한 점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굳이 IB로 우리나라 교육과정을 욱여 넣으려고 하는지가 해소가 안되는 가장 큰 의문점이다. 

 

아마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말이 왔다갔다 하는 듯 하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개떡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의 논리를 찰떡같이 최대한 정리하여 이해 해보자.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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