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을 앓으면서 22회 ECT 시술을 받은 치료 중간 경과를 기록해보고자 한다. 

중간 경과라 함은, 완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겠다.

- 실제로 ECT는 치료 효과 유지 기간이 길지 않아서 유지 치료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모든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고,

시술 외에 먹는 약물이나 나의 뇌의 작용으로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 반드시 시술 때문에 겪은 일이라고 볼 수 없다.

환자 개인으로서의 이야기이며, 지배적인 의학적 견해나 지식과는 무관하다.    

 


 

 

ECT (Electro Convulsive Therapy: 전기 경련 치료)는 아주 오래된 정신과 치료 방법이다. 

오래전에는 마땅한 마취 없이 이루어져 거의 고문 수준의 고통이었겠으나, 

현재는 마취과와 협력을 통해 잠든 상태로 진행된다.

 

옛날 영화에서 정신과 시술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흔하게 봤을 법한 광경에서 행해지는 게 바로 ECT 시술이다. 

머리에 무섭게 생긴 기구를 쓰고, 전기를 흘려보내면 환자가 고통스럽게 경련하다가 의식을 잃기도 한다.

전류가 몸에 흘러, 온몸이 부들부들 (수준이 아니라 와라라라락)하는 장면.

 


 

ECT를 받게 된 계기는 스프라바토가 더이상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살사고가 강했던 나는 두 달정도 스프라바토 치료를 받았는데, 딱 그때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자살충동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스프라바토는 가격도 비싸고, 받을 때 불편한 점도 많아서 더 이상 받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한 의사가 ECT치료를 받고 우울증이 호전되었다는 영상을 보시고는

자살충동이 심해졌을 때 ECT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내가 이미 써볼만한 약은 다 먹어보았던 것으로 보아, 

다른 병원에서는 '약물저항성 환자'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니까 나는 약물치료가 영 효과적이지 않은 환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 약물 치료가 잘 듣지 않는 환자. 그러면 물리적인 시술도 시도해 보는 것이 좋단다. 

 

총 3번 입원하여서 각각 8회, 10회, 4회 이렇게 총 22회 시술을 받았다. 

 

ECT의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이 바로 '단기 기억 상실'이라서,

사실 지금 기록을 한다고 해도 대부분 기억이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아 구멍이 많다. 안타깝게도.. 

 

그래도 기억 나는 대로 적어보지 뭐. 

 


 

두 번째 입원으로 10회를 받기로 하고 입원하여 첫 시술을 받았을 때, 두통과 어지럼증, 오심(속 울렁거림) 증상이 너무 심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서.. 이거 뭐 이거 못하겠는데? 싶었다. 

분명 그 이전에 8회 받았을 때는 하나도 안 아팠는데! 

 

회진 오신 교수님께 말씀드리니, 

'저번에도 처음 받으실 때 똑같이 아파하셨었는데... 제가 알고 있었는데, 제 잘못이죠 뭐.' 하셨다. 

기억 하나도 안 나는데 나는. 교수님은 알고 계셨다고 한다.

이게 부작용이다. 기억이 안 난다.

 

부작용으로 기억이 안 난다는 게, 가물가물하다 - 이런 느낌이 아니라 그냥 없던 일이 된다. 

그러니까 특정 기억이 안 난다는 걸 나는 스스로 알 수가 없다. 애초에 없던 기억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기억이 존재했다는 사실 조차 잊기 때문에. 

 

 

누군가가 옆에서 '너 이런 적 있잖아.' 혹은 '네가 이렇게 말했잖아, 내가 이렇게 말했잖아' 이러면 

그제야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냥 '엥 내가 그랬다고?' 이렇게 된다. 

나도 모르는 내가 있다. 그게 기분이 썩 찝찝하고 좋지 않다. 

그리고 뭔가 일상에서 문제가 생겼거나 하면 퍽 불리하다. 

 

기억이라는 게 사건만 잊는 것도 아니다. 감정을 잊는다.

예를 들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서운한 일이 있었다거나, 미워졌다거나 하는 일이 있어도.. 그 일을 잊어버림과 함께 그 일로 파생된 감정도 함께 잊는다. 그러니까 이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싫댔다가 좋댔다가 그런.

 

단기 기억 상실 부작용은

1. 시술 받기 전 3-4개월 전의 기억이 없어지는데

2. 다시 돌아온다

고 설명을 듣고 시술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나는 그냥 2024년 내내 기억이 거의 없다.

시술받을 때의 병원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입원과 입원 사이의 기억도 거의 없고,

게다가 그 전년도 기억까지 깡그리 희미해졌다.

3-4개월 정도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2년 정도의 기억이 바래졌다.

그 정도야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안 나는 거일 수도 있잖아!라고 하기엔 사진첩에 남아있는 너무나 소중한 기억들이 다 날아갔다. 그나마 당시에 브이로그라도 찍어두어서 엿볼 수 있기에 망정이지. 영 억울할 뻔했다.

 


 

 

몇 개월 간의 기억이 사라진 거나, 2년 정도의 기억이 희미해진 것 정도야

일을 쉬기도 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큰 사건도 없었고... 조금 기분이 찝찝하고 씁쓸한 것으로 끝나겠다만.

 

전공 지식이 조금 날아간 것은 문제가 크다.

대학 4년에 임용고시 공부, 학교에서의 업무 경력까지 따지면 국어를 다룬 게 족히 10년은 될 텐데...

내가 이 블로그에 중학생들 풀라고 낸 문제를 보고서 '이 문제를 내가 왜 냈지?' 하는 지경으로 기억이 안 나기 시작했다.

 

이건 심각하다... 싶어서 전공 서적을 오랜만에 조금 뒤적여 보니

공부한 건 어디 안 가는지 조금만 훑어보면 다시 돌아올 듯한데, 당시에는 이대로 국어교사의 자질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순간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다행이야. 니들은 어디 안 가서... 내가 어떻게 가진 내 새끼들인데 어디 가지 마라.  

 


 

잃어버린 기억들이 차츰 돌아온다고도 했는데, 돌아오기는커녕 새로운 기억들도 잘 저장이 안 된다. 

우울증에 걸리면 인지능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내가 일상에 집중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기엔 시술받기 전후가 너무나 확연히 달라서 ECT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8회, 10회, 4회 받으면서 사이사이 겪은 일들이야 시술 중간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4회를 받은 후로 지금까지. (4회는 2024년 11월경에 받았다.)

그러니까 2025년 3월까지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는 게 삐그덕거린다. 

 

진료를 보면서 자꾸 하는 말이 

'선생님 제가 띨띨해진 것 같아요'이다. 

 

어제 내가 운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 밥을 뭐 먹었는지 영 기억이 안 난다. 

너무 사소한 일이라서 중요하겠냐는 질문을 듣는다면. 

그런 사소한 것들을 잊는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겪어봐야 안다고 답하고 싶다. 기억이 날랑말랑 안 나니까. 답답하고 찝찝하고 참.... 불편하고 이상한데 이게 뭐라 형언하기 힘든 기분이 든다.  

 

 

 

 

-2-에 이어서...

 

반성문을 쓴 이후로 죽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열정적으로 살아보고자 한다면, 딱히 그건 또 아닌데 말이다. 

 

우울한 날이 있다. 일주일에 한두번정도. 

가슴이 아파서, 불안해서, 그런데 왜 불안한 건지도 몰라서, 이유 없이 치밀어오르는 우울감 때문에

그렇게 누워서 한없이 우울해하는 날이 있다. 

 

아무리 우울해도 죽고 싶은 생각은 안 난다. 묘하지.

 

버릇처럼 하던 말이, '나는 내일 죽어도 안 이상한 사람이야.' 였는데. 

이제 죽음은 나와 많이 멀어졌다. 그러니까, 죽음에 무관심해졌다. 

죽음에 대한 갈망을 딱히 떨쳐냈다거나 극복했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어졌다. 

 

죽을 이유를 못 찾겠다.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찾았냐고 묻는다면, 역시나 그건 또 아닌데 말이다. 

 


 

그냥 흘러간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숨쉬고. 그렇게 가만히 가만히 있다. 그렇게 존재하고 살고 있다. 

 

대학시절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이 유행이었는데,

학교 도서관에서 잠시 들춰보고서는 '내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가?' 고민이 생겼었다. 

 

친구와 술을 마시고 알딸딸 취한 상태로 신촌 거리를 거닐면서 이 얘기를 했더니, 

'지연아, 자존감 그거. 계속 생각하다보면 더 자신 없어진대. 차라리 그 생각을 하지 말아봐.' 했다. 

 

무관심해지니 이제 알겠다. 

무관심하면 생각도 안 나고, 생각이 안 나면 무관심해진다. 서로서로 그렇게 끌어당기면서 머물러 있던 것. 

 

이제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아프더라도 살아 있을 거다. 왜냐면. 살고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죽을 생각은 없어서. 딱히. 딱히 없어서... 

 

오늘 나는 책을 읽고, 요리를 하고, 애인이 내가 만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색칠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커피를 마시고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 내일도 그럴 거고. 매일이 그렇겠지. 

별다른 거 안 해도 되잖아? 

 

존재만 해도 되잖아.

존재만으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니까. 

 

그러니까 그냥 존재하고. 시간은 흐르고. 나는 숨쉬고. 그렇게 지내자. 

 

 

 

 

이것은 반성문이다.

 

처음 병이 발병하고 나서 다녔던 합정역에 위치한 개인병원에서 의사선생님께 들었던 말.

'아픈 지연씨도 지연씨예요.'

 

 

그동안 나는 이 말을 마음에 깊게 새기며 지내왔다. 

아픈 자신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아픈 자신도 사랑해라, 라는 의미였을까?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비뚤어지게 오해하기 시작했다. 


 

억울한 마음이 컸다.

술을 마시면 버릇처럼 하던 말이 '저 왜 아파야해요?' 였다. 

'나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나 왜 아파야 해요?' 라는 말. 이런 생각.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동안 자위해왔지만,

이제는 알겠다. 

나는 자신을 아주 불쌍하게 여기는,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면서 '아픈 나'를 내가 사랑해야겠으니, '당신'들도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신'들이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아픈 나도 나니까,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픈 내 모습도 다 사랑해야한다고 우겨왔다. 

그걸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그리고 사랑이라는 건, 아픈 나를 받아주는 거라고. 

 

아파서 내가 저지르는 안타까운 행동들도 다 '아파서 그랬구나'하고 넘어가줘야한다고. 

내 스스로 그래왔다. '아프니까'라며 내가 저지른 잘못들을, 잘못이 아니라고 여겨왔다. 

 

내가 종종 농담으로 '나 정신병자인데' 라고 말하는데,

친구가 나에게 한번은 '가불기네.' 라고 한 적이 있다. 그거 가불기라고, 그니까 병 얘기를 꺼내면 내가 다 이긴다고.

 


 

 

최근에 사고가 있었다. 

괴로워하는 나를 구하러 오빠와 새언니가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와주었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나를 쓰다듬어주는 새언니의 품에서 엉엉 울었다. 너무나 따뜻한 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동안에 내가 주변사람들에게 상처받았던 말이나, 서운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중에는 - '제가 약을 먹겠다고 했는데도 저를 가만히 뒀어요.', '저에게 피해의식이 있다고 했어요.' 등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새언니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주 따뜻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가 아파서 정말 힘들고 괴롭겠지만, 아픈 사람 옆을 지키는 사람도 아주 힘들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언니가 그냥 내 징징거림을 들어주고, 마냥 내편만 들어줄 줄 알았다. 

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애정을 가지고 하는 그 말이.. 그동안에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해왔는지, 나의 병에 대해서 또 병을 앓고 있는 나를 어떻게 비뚤어지게 봤었던건지.

 

3년 간의 행동과 생각이 스쳐지나가며, 후회와 부끄러움, 고마움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특히 애인이 그렇다. 

입장바꿔 생각해보면, 맨날 우울하다고 누워있어서 어디 나가지도 못 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죽겠다고 하는 사람 옆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지치겠는가. 

누구나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 마련인데, 애인이 사회복지사도 아니고,,, 참,,, 나 왜그랬지,, 

 

그동안 애인과 다투면

우울에 허덕이며 약을 처방 용량보다 더 먹고 자버리거나 감정을 잔뜩 실어 원망하는 문자를 보내거나 했던 것들. 

 

다 자기연민에 빠져 했던 추한 행동들. 

그리고나서 나는 '아프니까' 라고 스스로를 용서했다.

별별 잘못을 다 해놓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반성도 하지 않고

'아파서 그런거니까 개의치 말자'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애인과 다투고 자해를 한 나에게 애인이 '너는 병을 무기로 쓴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당시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걸...? 

 

근데 언니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러게, '나 아픈데 나를 괴롭게 해?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럼 나는 나를 해할거야' 같은 객기를 부린 게 맞다. 참 부끄럽지만..

나는 '나 아파요!' 하는 깃발을 흔든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칼을 휘두른 것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옆을 지켜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고 말이다.

 


 

 

 

아픈 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치만 아파서 하는 나의 잘못된 행동들도, 내가 한 '나'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아픈 나도 나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조울증을 앓고 있기 때문에

감정을 조절 못해서 종일 우울에 빠져 있는다든지, 갑자기 당일에 약속을 파투낸다든지, 애인에게 무성의하게 연락을 한다든지, 

집안을 엉망으로 방치한다든지, 자신을 해한다든지 등등의 행동들. 

 

그 행동도 '내'가 한 행동이니 내가 책임지고 수습해야하는 것이 맞는건데. 

아픈 나도 나니까 말이다. 

아픈 내가 한 행동도 내가 한 행동이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다. 

 


 

 

죽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죽지 않고 쿨쿨이(조울증)과 같이 사는 법을 계속 알아가봐야지.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에게 연대감을 갖게 하는 책이나, 그들을 위로하는 내용의, 혹은 우울증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비추거나, 자신의 행동이 병 때문이라는 걸 알려주는 책은 많지만. 

또 우울한 사람 옆에서 어떻게 해줘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책도 있고. 

 

근데 우울증과 조울증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 병을 가지고도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사회 안에서 공생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는 지침서는 못 본 것 같다. 

(특히 정치적으로 접근한 책들을 다 화가 나있어서 자기연민에 빠지기 더 쉬운 것 같다. 병을 크게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매몰되기도 쉽고)

 

아픈 건 잘못이 아니지만, 이미 아프기 시작한 걸 어떡해!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나도.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싶어서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어서요. 

당신도 그렇겠죠? 

 

 

이제 잘 해보고 싶다. 

오늘의 반성을 잊지 않고 내일은 나아진 모습으로 살자.

 

하루하루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 요즘이다.

자학행위나 약물자해를 한 적은 있지만,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손목을 긋거나 하는 자해는 한 적이 없다.

아니, 없었다. 

 

주변에서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만 달리 이유가 없어서, 이유를 답할 수가 없다. 

약과 술을 같이 먹으면 블랙아웃이 온다. 

행동 자체가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맨정신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해버린다. 

 

어느 날은 담뱃불을 손목에 지졌다. 왼쪽 손목에 담배빵 자국이 여럿 생겼다. 

그날은 절연한 친구에게 원망하는 문자를 보냈다... 그걸 알게 된 것은 여러날이 지난 후였다. 

 

피부과에 가서 담배빵 치료를 받는데, 흉터가 생길 거라고 했다. 

나의 과오가, 내 눈에 가장 잘 보이고 가장 자주 보이는 곳에 새겨졌다. 

흉터가 생길 거라고 하니 이제 누구에게도 숨길 수도 없을 것 같아 글을 쓰지만, 당시에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다.

나 같아도 무서울 것 같다. 내 주변 사람이 불타는 담배개비를 제 손으로 맨살에 부벼대는 사람이라면. 

 

지금은 많이 아물었지만 아직도 딱쟁이가 다 떨어지지 않았다. 

얼룩덜룩한 팔목을 보면, 나 참 별 쓸데없는 짓을 다 한다-싶다.


 

그날은 그저 잠에 들려고 했는데, 

술도 안 먹었는데 어느새 내 몸은 홍대 클럽 거리에 나가 있었다.

블랙아웃이 오기 전 기억으로는, 9시부터 문을 연 클럽에 혼자 앉아서 데낄라 샷을 6잔을 내리 목구멍에 부었던 것 같다. 

 

그 다음으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집에 오니 발목은 삐어서 퉁퉁 부어있어 절룩거리며 걸어다니게 되었고, 머리통과 팔목, 엉덩이 구석구석 멍과 혹이 생겼다.

말그대로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잘도 집에 돌아왔다. 

 

이번에도 누군가에게 되도 않는 메세지를 보냈고, 

누군가와 몸싸움을 했거나 혼자 넘어졌거나 그랬겠지.

 

참 

쓸데없는 짓을 다 한다.


 

요즘 왜 사람은 자신의 '생'과 '사'를 선택할 수 없는가를 생각한다.

'생'이야말로, 마지 주어진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귀한 가치인 듯 평생 가스라이팅 당하고. 

'사'는 '생'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말로로 치부된다. 

 

그런데 난 '생'을 받은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 

이것도 내가 선택하지 못했는데, '사'는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원망스럽다. 

 

'해충박멸'

해충도 생명인데 말이지. 나도 해로운 인간일 수도 있는데 말이지. 

나도 독하고 집요하게 박멸 당해도 되는데 말이지. 

 

 

 

 

친구가 '지연 너 진짜로 죽지 마라' 라고 했다. 

나는 '왜?'라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가 '왜라고 하지말고 알겠다고 해야지. 다음에 다시 물어볼게. 그때 알겠다고 해.' 라고 했다. 

'그냥 알겠다고 해'

 

참. 왜냐고 되묻는 게 이상하긴 해.


 

친구가 '행복해보이던데' 라고 하길래,

나는 '찰나야, 나날이고 싶은데'라고 했다. 

 

친구는 좋은 표현이라고 이런 거 기록해두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웃기는 애다. 


 

내가 '속상하다'고 하니,

친구는 '내가 아는 너는 속상해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몽하는 사람인데, 왜이리 지쳤나.' 했다. 

 

그러게. 나다운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좋다. 

 

 

 

 

쿨쿨이(조울증)때문이려나 기본적으로 생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나 기대를 별로 하지 않기도 한데 

남들이 흔히 말하는 '현타'를 맞으면 자살 충동이 세게 올 때가 있다.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마치 나는 컴퓨터고 누가 나에게 명령어를 입력한 것처럼 내 생각을 내가 통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만히 놔둬도 혼자서 알 수 없는 글씨들이 써지고 지워지며 검은 화면이 채워지는 프로그래밍 코딩 화면 마냥 죽고 싶다는 생각과 어떻게 죽을 것인지 등등의 생각이 빠르게 와르르르 지나간다. 

 

마치 아주 쎄게 처 맞은 기분이다. 

보통은 헛짓거리하다가 '정신 차려!'일 텐데, 나는 살아보려다가 '그냥 죽자!'가 된다.

 

최근 그 빈도가 잦아졌다. 버릇인가 싶을 정도로. 

버릇처럼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또 은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 거 같기도 하고....

 


 

번개 맞은 것처럼 강한 자살 충동이 왔을 때 대처하는 루틴을 만들었다.

딱히 만든 건 아니고, 이렇게 해보니 효과가 좋아서..루틴이 되었다. 

 

STEP1. 빠르게 옷을 챙겨입고 찬바람을 쐐러 나간다. 
STEP2. 흥분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줄담배를 피운다. 
STEP3. 엘레베이터나 화장실 거울을 보며 내가 얼마나 예쁜지 생각한다. 
 - 그리고 살면서 만난, 영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잘먹고 잘사는 인간들을 떠올린다. 
STEP4. 자살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묵주기도를 한다. 

 

 

이대로 하면 꽤 빠르게 잦아들더라....

그니까.... 담배는 내 치료제라고........... 


 

가장 버림 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애인은 아주 이른 새벽,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다.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인지 한밤중인지 경계가 애매한 새벽 4시.

매일같이 누구보다 빨리 하루를 시작하는 그는, 내가 눈을 뜨기 전, 그러니까 아침이 오기도 전에 그날의 첫 메시지를 남긴다.

 

나의 병에 '쿨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며칠 후였나, 어김없이 04시 56분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지연, 새벽아 춥다 따듯하게 자 사랑해 

 

'새벽아' ?

오타였을까? '새벽 아침'이라고 치려고 했던 걸까? '새벽이 춥다'고 하려던 걸까?

마치 나를 '새벽'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 그 우연한 오타에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내가 만약 '새벽' 같은 사람이라면, 

나의 병인 '쿨쿨이'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쿨쿨이'보다 먼저 일어나서 '나'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새벽의 시간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연인지, 운명인지

어쩌다가 '새벽'이라고 불린 나는, 그게 나였으면 했다. 

 

그래서 그에게 나를 '새벽'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였다. 

 

고요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는, 밝은 빛도 따스한 햇볕도 없는 차가운 밤이 아니라 

아침을 기대하는, 모든 생명이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오늘 하루의 남은 시간을 향유하는

그런,

새벽을 사는 사람이고 싶다. 

 

 

 

'이름'은 대상을 다른 것들과 구별 지어 준다.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것을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특정한 하나의 존재로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대한민국이 사랑하는 시,

김춘수의 <꽃>이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 김춘수의 <꽃> 중에서

 

 

또 많은 문화권에서 이름을 짓고 부르는 행위는 대상에 대한 지배력의 행사를 의미한다. 

 

소설 <해리포터>에서 악인 볼드모트는 너무 두려워서 그 이름을 부르기 조차 무서운 존재로 표현된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구마사제는 악마의 이름을 알아야 인간의 몸에 들어간 악마를 내보낼 수 있다. - 김범신 베드로(김윤석)가 이영신(박소담)의 눈을 가리고 이름을 반복해서 묻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일본의 만화 <데스노트>에서 상대의 이름을 알아야 죽일 수 있다는 설정도 비슷한 맥락이다. 

 

 


 

 

 

최근 양극성 장애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깊게 새겨진 내용은 

조울증은 완치의 개념이 없고, 평생 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외래를 볼 때도 가끔 교수님께 '나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러면 항상 되물으셨다. '낫는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냐'고. 

들었던 답변은 약은 평생 먹어야 할 거고, 약을 먹어서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가 낫는 거라 생각하면 나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 병과 죽는 날까지 함께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병을 싸우거나 극복해야하는 대상으로 삼으면 참 고달프겠구나, 병을 미워하면 정말 괴롭겠구나 싶었다. 

 

주변에서 종종 나에게 '이겨내야지'라는 표현을 한다. 

내가 조울증을 평생 앓는다면, 과연 이겨낸다는 건 뭘까? 나는 지금 싸우고 있는 건가? 그럼 지는 것도 있는 걸까?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 같은 마음으로 병을 대하기로 했다. 

병을 혼쭐내주고 말 안 듣는다고 원망할 게 아니라, 

어르고 달래고... 우쭈쭈 해주고....... 얘도 괴롭지 않게 달다구리도 사주고 그러면서 같이 살아보려고...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보호자와 이야기할 때에도 귀여운 이름을 지어 병을 부르면,

매번 본인이 환자고 질병을 달고 있다는 인식을 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내 조울증의 이름은 '쿨쿨이'로 지었다. 

어릴 때 보던 만화 <방가방가 햄토리>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 항상 양말 속에 들어가서 잠만 자는 햄스터 캐릭터가 있는데, 그 캐릭터의 이름에서 따왔다. 

 

너무 날뛰지 말고(?) 잠이나 자라는 ,,, 의미에서 그렇게 지었다. 꽤나 귀여운 듯? ㅎㅅㅎ

- 그리고 ,,, 기면증까지 있는 나의 병에게 꽤나 적절하다.

 

이건 딴소리인데, <방가방가 햄토리>는 주인이 외출했을 때 햄스터들이 철창을 탈출(?)해서 어디 무슨 나무 밑에 지하 같은 데에 모여가지고, 노는 그런 스토리의 만화인데.... 으른이 되어서 생각해보면 햄스터는 수명이 1.5년~2년정도라고 하던데.. 그들의 스토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나....

 

 

아 참, 그리고 우연히도 오늘이 햄토리 쿨쿨이 생일이더라! 축하해 ㅎㅅㅎ


 

 

쿨쿨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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