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을 앓으면서 22회 ECT 시술을 받은 치료 중간 경과를 기록해보고자 한다.
중간 경과라 함은, 완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겠다.
- 실제로 ECT는 치료 효과 유지 기간이 길지 않아서 유지 치료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모든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고,
시술 외에 먹는 약물이나 나의 뇌의 작용으로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 반드시 시술 때문에 겪은 일이라고 볼 수 없다.
환자 개인으로서의 이야기이며, 지배적인 의학적 견해나 지식과는 무관하다.
ECT (Electro Convulsive Therapy: 전기 경련 치료)는 아주 오래된 정신과 치료 방법이다.
오래전에는 마땅한 마취 없이 이루어져 거의 고문 수준의 고통이었겠으나,
현재는 마취과와 협력을 통해 잠든 상태로 진행된다.
옛날 영화에서 정신과 시술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면 흔하게 봤을 법한 광경에서 행해지는 게 바로 ECT 시술이다.
머리에 무섭게 생긴 기구를 쓰고, 전기를 흘려보내면 환자가 고통스럽게 경련하다가 의식을 잃기도 한다.
전류가 몸에 흘러, 온몸이 부들부들 (수준이 아니라 와라라라락)하는 장면.
ECT를 받게 된 계기는 스프라바토가 더이상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살사고가 강했던 나는 두 달정도 스프라바토 치료를 받았는데, 딱 그때뿐이지 시간이 지나면 자살충동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스프라바토는 가격도 비싸고, 받을 때 불편한 점도 많아서 더 이상 받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한 의사가 ECT치료를 받고 우울증이 호전되었다는 영상을 보시고는
자살충동이 심해졌을 때 ECT를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내가 이미 써볼만한 약은 다 먹어보았던 것으로 보아,
다른 병원에서는 '약물저항성 환자'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니까 나는 약물치료가 영 효과적이지 않은 환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 약물 치료가 잘 듣지 않는 환자. 그러면 물리적인 시술도 시도해 보는 것이 좋단다.
총 3번 입원하여서 각각 8회, 10회, 4회 이렇게 총 22회 시술을 받았다.
ECT의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이 바로 '단기 기억 상실'이라서,
사실 지금 기록을 한다고 해도 대부분 기억이 날아가서 돌아오지 않아 구멍이 많다. 안타깝게도..
그래도 기억 나는 대로 적어보지 뭐.
두 번째 입원으로 10회를 받기로 하고 입원하여 첫 시술을 받았을 때, 두통과 어지럼증, 오심(속 울렁거림) 증상이 너무 심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서.. 이거 뭐 이거 못하겠는데? 싶었다.
분명 그 이전에 8회 받았을 때는 하나도 안 아팠는데!
회진 오신 교수님께 말씀드리니,
'저번에도 처음 받으실 때 똑같이 아파하셨었는데... 제가 알고 있었는데, 제 잘못이죠 뭐.' 하셨다.
기억 하나도 안 나는데 나는. 교수님은 알고 계셨다고 한다.
이게 부작용이다. 기억이 안 난다.
부작용으로 기억이 안 난다는 게, 가물가물하다 - 이런 느낌이 아니라 그냥 없던 일이 된다.
그러니까 특정 기억이 안 난다는 걸 나는 스스로 알 수가 없다. 애초에 없던 기억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기억이 존재했다는 사실 조차 잊기 때문에.
누군가가 옆에서 '너 이런 적 있잖아.' 혹은 '네가 이렇게 말했잖아, 내가 이렇게 말했잖아' 이러면
그제야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게 아니라 그냥 '엥 내가 그랬다고?' 이렇게 된다.
나도 모르는 내가 있다. 그게 기분이 썩 찝찝하고 좋지 않다.
그리고 뭔가 일상에서 문제가 생겼거나 하면 퍽 불리하다.
기억이라는 게 사건만 잊는 것도 아니다. 감정을 잊는다.
예를 들면 어떤 대상에 대해서 서운한 일이 있었다거나, 미워졌다거나 하는 일이 있어도.. 그 일을 잊어버림과 함께 그 일로 파생된 감정도 함께 잊는다. 그러니까 이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싫댔다가 좋댔다가 그런.
단기 기억 상실 부작용은
1. 시술 받기 전 3-4개월 전의 기억이 없어지는데
2. 다시 돌아온다
고 설명을 듣고 시술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나는 그냥 2024년 내내 기억이 거의 없다.
시술받을 때의 병원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입원과 입원 사이의 기억도 거의 없고,
게다가 그 전년도 기억까지 깡그리 희미해졌다.
3-4개월 정도라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2년 정도의 기억이 바래졌다.
그 정도야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안 나는 거일 수도 있잖아!라고 하기엔 사진첩에 남아있는 너무나 소중한 기억들이 다 날아갔다. 그나마 당시에 브이로그라도 찍어두어서 엿볼 수 있기에 망정이지. 영 억울할 뻔했다.
몇 개월 간의 기억이 사라진 거나, 2년 정도의 기억이 희미해진 것 정도야
일을 쉬기도 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큰 사건도 없었고... 조금 기분이 찝찝하고 씁쓸한 것으로 끝나겠다만.
전공 지식이 조금 날아간 것은 문제가 크다.
대학 4년에 임용고시 공부, 학교에서의 업무 경력까지 따지면 국어를 다룬 게 족히 10년은 될 텐데...
내가 이 블로그에 중학생들 풀라고 낸 문제를 보고서 '이 문제를 내가 왜 냈지?' 하는 지경으로 기억이 안 나기 시작했다.
이건 심각하다... 싶어서 전공 서적을 오랜만에 조금 뒤적여 보니
공부한 건 어디 안 가는지 조금만 훑어보면 다시 돌아올 듯한데, 당시에는 이대로 국어교사의 자질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순간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다행이야. 니들은 어디 안 가서... 내가 어떻게 가진 내 새끼들인데 어디 가지 마라.
잃어버린 기억들이 차츰 돌아온다고도 했는데, 돌아오기는커녕 새로운 기억들도 잘 저장이 안 된다.
우울증에 걸리면 인지능력이 저하되기 때문에
내가 일상에 집중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기엔 시술받기 전후가 너무나 확연히 달라서 ECT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8회, 10회, 4회 받으면서 사이사이 겪은 일들이야 시술 중간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4회를 받은 후로 지금까지. (4회는 2024년 11월경에 받았다.)
그러니까 2025년 3월까지 새로운 기억을 저장하는 게 삐그덕거린다.
진료를 보면서 자꾸 하는 말이
'선생님 제가 띨띨해진 것 같아요'이다.
어제 내가 운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 밥을 뭐 먹었는지 영 기억이 안 난다.
너무 사소한 일이라서 중요하겠냐는 질문을 듣는다면.
그런 사소한 것들을 잊는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겪어봐야 안다고 답하고 싶다. 기억이 날랑말랑 안 나니까. 답답하고 찝찝하고 참.... 불편하고 이상한데 이게 뭐라 형언하기 힘든 기분이 든다.
-2-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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