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반성문이다.

 

처음 병이 발병하고 나서 다녔던 합정역에 위치한 개인병원에서 의사선생님께 들었던 말.

'아픈 지연씨도 지연씨예요.'

 

 

그동안 나는 이 말을 마음에 깊게 새기며 지내왔다. 

아픈 자신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아픈 자신도 사랑해라, 라는 의미였을까?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비뚤어지게 오해하기 시작했다. 


 

억울한 마음이 컸다.

술을 마시면 버릇처럼 하던 말이 '저 왜 아파야해요?' 였다. 

'나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나 왜 아파야 해요?' 라는 말. 이런 생각.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동안 자위해왔지만,

이제는 알겠다. 

나는 자신을 아주 불쌍하게 여기는,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이었다는 걸. 

 

그러면서 '아픈 나'를 내가 사랑해야겠으니, '당신'들도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신'들이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아픈 나도 나니까,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픈 내 모습도 다 사랑해야한다고 우겨왔다. 

그걸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그리고 사랑이라는 건, 아픈 나를 받아주는 거라고. 

 

아파서 내가 저지르는 안타까운 행동들도 다 '아파서 그랬구나'하고 넘어가줘야한다고. 

내 스스로 그래왔다. '아프니까'라며 내가 저지른 잘못들을, 잘못이 아니라고 여겨왔다. 

 

내가 종종 농담으로 '나 정신병자인데' 라고 말하는데,

친구가 나에게 한번은 '가불기네.' 라고 한 적이 있다. 그거 가불기라고, 그니까 병 얘기를 꺼내면 내가 다 이긴다고.

 


 

 

최근에 사고가 있었다. 

괴로워하는 나를 구하러 오빠와 새언니가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와주었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나를 쓰다듬어주는 새언니의 품에서 엉엉 울었다. 너무나 따뜻한 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그동안에 내가 주변사람들에게 상처받았던 말이나, 서운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중에는 - '제가 약을 먹겠다고 했는데도 저를 가만히 뒀어요.', '저에게 피해의식이 있다고 했어요.' 등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새언니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주 따뜻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가씨가 아파서 정말 힘들고 괴롭겠지만, 아픈 사람 옆을 지키는 사람도 아주 힘들다는 걸 잊으면 안된다.'는 말이었다.

 

솔직히 언니가 그냥 내 징징거림을 들어주고, 마냥 내편만 들어줄 줄 알았다. 

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애정을 가지고 하는 그 말이.. 그동안에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해왔는지, 나의 병에 대해서 또 병을 앓고 있는 나를 어떻게 비뚤어지게 봤었던건지.

 

3년 간의 행동과 생각이 스쳐지나가며, 후회와 부끄러움, 고마움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특히 애인이 그렇다. 

입장바꿔 생각해보면, 맨날 우울하다고 누워있어서 어디 나가지도 못 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죽겠다고 하는 사람 옆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지치겠는가. 

누구나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기 마련인데, 애인이 사회복지사도 아니고,,, 참,,, 나 왜그랬지,, 

 

그동안 애인과 다투면

우울에 허덕이며 약을 처방 용량보다 더 먹고 자버리거나 감정을 잔뜩 실어 원망하는 문자를 보내거나 했던 것들. 

 

다 자기연민에 빠져 했던 추한 행동들. 

그리고나서 나는 '아프니까' 라고 스스로를 용서했다.

별별 잘못을 다 해놓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반성도 하지 않고

'아파서 그런거니까 개의치 말자'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애인과 다투고 자해를 한 나에게 애인이 '너는 병을 무기로 쓴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당시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걸...? 

 

근데 언니의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러게, '나 아픈데 나를 괴롭게 해?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럼 나는 나를 해할거야' 같은 객기를 부린 게 맞다. 참 부끄럽지만..

나는 '나 아파요!' 하는 깃발을 흔든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칼을 휘두른 것이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옆을 지켜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고 말이다.

 


 

 

 

아픈 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치만 아파서 하는 나의 잘못된 행동들도, 내가 한 '나'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아픈 나도 나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조울증을 앓고 있기 때문에

감정을 조절 못해서 종일 우울에 빠져 있는다든지, 갑자기 당일에 약속을 파투낸다든지, 애인에게 무성의하게 연락을 한다든지, 

집안을 엉망으로 방치한다든지, 자신을 해한다든지 등등의 행동들. 

 

그 행동도 '내'가 한 행동이니 내가 책임지고 수습해야하는 것이 맞는건데. 

아픈 나도 나니까 말이다. 

아픈 내가 한 행동도 내가 한 행동이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다. 

 


 

 

죽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죽지 않고 쿨쿨이(조울증)과 같이 사는 법을 계속 알아가봐야지.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에게 연대감을 갖게 하는 책이나, 그들을 위로하는 내용의, 혹은 우울증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비추거나, 자신의 행동이 병 때문이라는 걸 알려주는 책은 많지만. 

또 우울한 사람 옆에서 어떻게 해줘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책도 있고. 

 

근데 우울증과 조울증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 병을 가지고도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사회 안에서 공생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는 지침서는 못 본 것 같다. 

(특히 정치적으로 접근한 책들을 다 화가 나있어서 자기연민에 빠지기 더 쉬운 것 같다. 병을 크게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매몰되기도 쉽고)

 

아픈 건 잘못이 아니지만, 이미 아프기 시작한 걸 어떡해!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나도.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싶어서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어서요. 

당신도 그렇겠죠? 

 

 

이제 잘 해보고 싶다. 

오늘의 반성을 잊지 않고 내일은 나아진 모습으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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