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에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계기가 다소 지저분하여 유감이지만, 이 기막힌 감정을 뚫어낼 곳이 달리 없기 때문에 글에다 쏟아내고자 한다. 

 

꽤 오랜 기간 병을 앓으면서, 또 나의 병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면서

사람들이 정신병(특히 우울증과 조울증의 차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또 안일하게 결론짓는지... 형언하려면 한 세월이다.

아픈 당사자로서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그것-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그래서 어떤 고통을 겪고, 일상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하는 역할은 나 자신이다.

매일같이 '왜 살아야하는 걸까?' 라는 의문을 가지며 삶의 회의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나의 아픔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 지치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돼?'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2024년 겨울 이후,

나는 한 종교의 청년회에 속해 활동하고 있었고, 청년회 안에서 서로 취미가 맞는 사람끼리 만든 소모임에도 여럿 들어가 있었다. 

( 나는 모태신앙이다. 청년회 활동은 형제-오빠의 권유로 하게 되었다. 오빠는 당시 병세가 악화되어 무기력하게 지내던 내가 청년회 활동을 통해 동네 친구와 취미 활동도 하고, 함께 기도도 하며 우울감을 희석시켰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한다.) 

 

그 해 여름날,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청년회 단톡방에서 메신저상으로 어떤 두 청년이 의견 다툼을 하게 된 것. 대략 종교적인 내용이었다. 

편의상 두 사람을 각각 '열매'와 '마리'라고 하겠다. 

 

열매와 마리는 전체 청년회 단톡방에서 다소 날선 말을 몇 차례 주고 받았고, 열매는 곧 단톡방을 나가버렸다.

( 사실 열매는 종종 그랬던 사람이다. 청년회 활동을 아주 오래했지만, 와중에 자신이 기분이 나쁘면 단톡방을 나가고 또다시 초대받는 일을 으레 반복했던 사람이다. )

 

전체 단톡방을 나간 열매는 소모임 단톡방에서 마리의 뒷담화를 시작했다.

이때 열매가 마리를 욕하며 쓴 말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흔하게 쓰이는 표현이면서도, 혐오적인 의미를 가득 담고 있는 저급한 표현이었다. 

 

" 정신병이 틀림 없는 듯 " 

 

 

'정신병이 틀림 없는 듯', '정신병이 틀림없는 듯', '정신병이 틀림없는 듯', '정신병이 틀림없는 듯'........ 

맥락상 누가 보아도 열매는 '정신병'에 혐오적인 의미를 담아 사용하고 있었다. 

 

( 마리는 꽤 중증으로 우울증을 앓은 경험이 있고 또 그 단톡방에는 현재진행형으로 중증 정신병 환자인 나도 있었다. 마리의 병력을 열매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일상에 지장이 있을 정도(휴직 등)로 중증 정신병 환자라는 건 열매도 알고 있었다. )

 

열매가 자신의 화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올바름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되는 대로 뱉은 말이었겠지.  

 

안타까운 건 해당 소모임 단톡방에 마리도 있었다는 것. 

( 마리가 단톡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열매는 마리가 없는 것으로 착각했다. )

마리는 차분하게 열매에게 다시 반박하는 메세지를 보냈고, 열매는 소모임 단톡방도 나가버렸다. 

 

열매가 나간 후, 나는 곧바로 해당 소모임 단톡방에 '정신병에 혐오적 의미를 담아서 쓰지 않았으면 한다' 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이 사건에서 상처를 받은 건,

당사자인 마리는 물론이거니와 실제 중증 정신병 환자인 였다.  

 

오늘을 죽느니 사느니 하는 나의 고통과 아픔이 다른 이에게는 모욕으로 쓰인다니.

정신병.. 정병.. 내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정신병이라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 걸 직접 보니, 진짜 정신병자-나는 참으로 비참했다. 

며칠을 얼마나 울었을까.

나는 당사자도 아닌데. 내가 욕을 먹은 당사자도 아닌데, 자꾸만 슬퍼서 눈물이 샜다. 

 

오빠와 청년회 임원들에게 마리와 나의 이야기를 전달하였고 

여러차례 열매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열매는 끝내 나에게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 이때 열매가 마리에게는 개인적으로 사과를 했다. 나에게 사과하는 일에 대해서는 '정신병'이라는 말을 나에게 직접한 것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해야 하냐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전해 들었다. )  

 

우리 가족(나와 오빠, 새언니)은 내가 열매의 사과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이런 기분으로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청년회를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러자 청년회의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극구 말렸다. 나가지 말라며, 열매가 사과하도록 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어른들까지 애쓰시는 정성스러운 설득에.. 우리는 열매의 사과를 기다리며 청년회에 남았다. 

 

 

그게 2024년 여름이었다고 했지? 

해가 바뀌고, 2025년 1월이 되어서도 나는 사과를 받지 못했다.

열매는 본인이 청년회를 나가면 될 거라며, 청년회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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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사고가 심해져 11월말경 ECT(전기경련치료)를 받으러 입원했던 나는 청년회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 세번째 받는 시술로 유지치료 목적이었는데, 4회를 받았으나 그전만큼 효과를 보지 못했다. ) 

어영부영 무기력하게 지내던 나는 해가 넘어가고 1월 2일, 술을 먹고 처음으로 자해를 했다.

상처가 꽤 심했다.

애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약을 발라 주었고, 나에게 먼저 같이 기도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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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애인 손을 잡고 기도를 드리러 간 그날, 나는 그 사건 이후 처음으로 열매를 보았다. 

모르는 척 했다.

그냥 모르는 척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려던 참이었다.

새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을 듣자 하니 열매가 어물쩍 청년회 식사자리까지 왔고, 그것을 본 오빠가 식당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는 것. 

 

언니와 오빠는 나에게 '신경 쓰지 말라'며 푹 쉬라고 하였고, 

알겠다고 하며 괜찮은 척 전화를 끊은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에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차에 시동을 걸어 곧장 열매가 있는 청년회 식사자리로 돌아갔다. 

( 내가 화가 났던 이유는 열매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불쑥 식사자리에 나타난 것이, 그 자리에 있던 자신 때문에 애쓰고 속썩었던 사람들을 무시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오빠가 있었고, 오빠가 식사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 나는 분노했다. 혈육이라고 과하게 편드는 것이냐, 싶기도 하겠지만 오빠는 누가 보아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정도로 청년회에서 상당히 맡은 역할이 크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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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대를 잡고 '흥분하면 안 돼'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열매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쌍욕이었다. 

화를 내는 나에게 열매는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싸우러 왔냐'고 물었고, 누군가는 달려드는 나를 보며 웃었다. 그 상황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고 했다. 

 

분명 열매는 나에게 잘못을 한 사람이었고, 나는 사과를 받아야하는 사람이었는데? 

 

누군가에겐 죽을병이, 누군가에겐 웃긴 상황이 되는 거지. 

누군가에겐 죽을병이, 누군가에겐 일방적으로 화낼 만한 것도 아니라 투쟁해야 하는 일인 거지. 

 

 

--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열매를 불렀다. 

열매는 '나부터 얘기할까?' 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매는 당시에 나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었다고 한다.

분명히 사과한다는 뜻을 전하였으나 여러 사람을 통해 말이 오고 가면서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하였는데,

아직 사실관계는 알 수 없다.  

 

열매가 '정신병'을 욕으로 사용하고,

상처를 받은 나는 당시에 오빠를 통해서 내 이야기를 전달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오빠의 권위와 권력 뒤에 숨어있는 여동생과 여동생을 대변하느라 일을 크게 벌이는 오빠의 모습으로 비쳤나 보다. 

나보고 열매에게 직접 기분 나쁜 걸 이야기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걸 설명하며

내가 슬프다고 호소하고 애쓸 바에, 나는 번개탄과 청테이프를 주문하는 조울증 환자라고 대답하고 싶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는 당연한 건데. 나를 피해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2025년 1월 5일, 

불쑥 청년회 모임에 나타난 열매에게 어찌되었든 나는 사과를 받았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열매가 나에게 사과를 하며 했던 말이 머리에 맴돌아서. 

열매는 변명을 하듯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도 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고, 지금도 계속 먹고 있어

 

 

정신병을 비하할 의도는 없었고, 그저 욕을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런데 내가 상처받을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열매 본인도 우울증 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 본인도 정신병을 앓고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는 의미로 한 말 같았다. 

 

이 말이 내 머리에 계속 맴돌았던 이유는

내가 이런 말을 듣는 이유가 뭘까? 계속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고,

묘하고 찝찝한 기분으로 계속 짱구를 굴리던 끝에 이제 명확히 말할 수 있어서 이곳에 기록해 두려고 한다. 

 


 

 

1. 나는 양극성장애(조울증)이다.

2. 조울증은 우울증과 다른 질병이다.

  - 예를 들면, 조울증은 항우울제를 처방하여 치료할 수 없다. 

  - 그러니까 급체를 하든, 장염에 걸리든 구토를 하겠지만 소화가 위에서 안 되는지, 장에서 안 되는지는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 조울증과 우울증 모두 우울 삽화를 경험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전혀 다른 병이고. 치료 방식이나 증상 양상 등도 매우 다르다. 

3. 우울증을 '진단' 받은 환자와 단순히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먹는 환자는 다르다. 

  - 요즘 소화가 잘 안 되어서 소화제를 처방받아 먹는 환자나 카베진을 챙겨먹는 사람과, 위염이나 위암에 걸린 사람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

  - 정신과는 환자와의 말을 통해 임상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단을 받으려면, -그러니까 의사의 진단서를 받거나 하려면- 최소 3개월정도는 꾸준히 내원하며 치료를 받아야 한다. 

  - 감정 혹은 수면 등에 문제가 있어서 항우울제, 수면제 등을 처방받아 복용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우울증 환자인 것은 아니다. 단기복용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동안 내가 어떤 동력으로 살아왔는지,

남들은 왜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자살이 왜 금기시되는 것인지,

나는 죽고 싶은데, 왜 나의 생과 사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인지 매일 생각하고,

 

참 뭐랄까..

살기도 귀찮고, 죽기도 귀찮은 나에게

- 이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살기도 귀찮고 죽기도 귀찮음. 

 

열매의 말은

웃겼다.

사람들이 정신질환에 얼마나 무지한지. 

열매가 우울증 환자인지 기분이 일상에 얼마나 지장을 주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알 바도 아닌 게 실제 우울증 환자라면 저런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니까 약간 이런 거지.. 죽네사네 투병하는 암환자한테 -예를 들면 간암 환자한테, 자기도 간장약 챙겨먹는다는 거랑 같다고. 

 


 

 

정말로 나와 비슷한 투병 경험이 있어서, 마음으로 공감해 주는 친구도 만났었다. (사실 그게 마리임..ㅋ) 

그런 친구의 위로와 관심은 나에게 아주 큰 용기가 되기도 했고

-정신질환 환자는 심리적으로 방어적이고, 무기력한 경우가 많아서 ... 도움에 '부응'해야한다는 부담을 주지 않고, 다가가는 것은 기술적으로 쉽지 않은데,  마리는 그 선을 잘 지키며 다가와 준 유일한 친구.  

나에게도 그런 친구는 잘 자라고 있는지 종종 확인하는 화분이 되기도 한다. 

 

우울증은 많이 알려져있지만,

양극성장애(조울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서점에도 보면 조울증과 관련한 내용은 우울증에 대충 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조증 삽화를 한번이라도 경험하면 양극성장애로 치료 방향을 바꾸는데,

그래서 내가 입원했던 병동에서 만난 환우들은 다수가 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우울증보다 조울증이 더 수가 많은 듯 보였다. 

 

 

정신과 질환은 뭐 어디 잡고 쓰러지거나 앓아눕는 병이 아니니까 

sns를 하거나, 약을 먹으면 어느 정도 살아서(?) 연애를 하거나, 사회생활도 좀 하거나 이러면 별로 안 아프다고 대충 확증편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정도 살아서 움직이는 것도 참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주변에서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좀 봐달라, 나는 아프니까 배려해달라 이런 엄살이 아니라,,, 아픈 척하며 병을 무기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진짜 마음처럼 안 되는 게 마음이라

 

매년 20~40대 교사라면 피할 수 없는 이벤트가 있다. 

 

바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다. 

요상한 입시제도와 대학진학에 대한 뒤틀린 가치관이 만나 수능날은 일년 중 온국민이 제일 조심스러운 하루가 되었다.

수능 듣기 평가 시간 35분간 국내 전 지역에서 (비상 긴급 상황을 제외하고)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을 금지한다고 하니, 얼마나 기행적인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란 말 그대로 '대학 교육'에 필요한 수학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인데, 

어째서인지 중등교육 종사자들이 감독관으로 위촉되어 (라고 쓰고 착출이라고 읽는다) 수능감독을 해야한다. 

 

수능감독은 누가 들어가든 부담스러운 자리일 것이다.

그러나 수능감독관은 '위촉'되는 것치고는 당사자의 승낙 과정이 없다. 

보통은 '나이순'으로 단위학교 혹은 교육지원청에서 대상 명단을 작성한다.

_ 한 명의 감독관이 4-5개의 과목을 감독해야하는데, 왜 감독관을 늘려 감독관 1인의 부담을 줄이지 않는지 의문이다.

 

수능감독관은 승낙과정은커녕 위촉을 거절하려면 서류가 필요한데, 요구하는 서류가 꽤나 까다롭다. 

건강 상의 문제가 있는 사람은 '종합병원의 진단서'를 제출해야만 수능감독 위촉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다. 

 

개인병원의 진단서는 안된다. 꼭 종합병원이어야 한다. 

 

공무원이 병휴직을 하는 데에도 종합병원의 진단서를 요구하지 않는데, 수능감독에서 제외되려면 이 서류가 필요하다. 

정말... 이상한 기준이다. 


 

나의 첫 공황발작은 2021년 11월. 수능 일주일전이었다. 

물론 나는 학교에서 거의 막내로 이미 수능감독관 명단에 올라있었다. 

 

손이 벌벌 떨리고, 식은땀이 나며, 세상에 심장과 나만 있는 것 같은 심장박동을 느끼면서 

수능감독...나 이거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다. 

시험 시간에 공황이 오거나 불안증세가 심해져서 숨이라도 몰아쉬고 소음이라도 내면 소송감이다. 

당시 나는 지하철을 타면 '빨리 집에 들어가야겠다. 사람이 너무 많다. 여기서 벗어나서 혼자 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수준으로 불안 증세가 심했다. 

 

하지만 당장 나에겐 종합병원 진단서도 없었을 뿐더러,

교육청에 명단을 제출 하기 전에 진단서를 냈어야하기 때문에, 진단서가 있어봤자 이미 소용 없어진 후였다. 

- 게다가 정신과는 진단서를 잘 써주지 않는다. 최소 3개월 이상 통원 치료를 받아야 진단서를 받을 수 있는데, 그 마저도 안 써주는 선생님들도 많다. 아마 환자의 말을 토대로 임상적인 진단을 내리기 때문일 것이다. _ 진단서는 법적 효력이 있기 때문에 악용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학교 측에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수능감독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학교에서는 일단 예비소집 (수능시험장 학교)에 가서 예비감독관이 있는지 확인하라고 했다. 

 

예비소집(수능시험장 학교)에 가서 난..... 혼이 났다. 

이제와서 못하겠다고 하면 어쩌냐고, 그 학교 교감선생님께 짜증이 잔뜩 섞인 타박을 들었다.

우리 학교에서 책임지고 대체 감독관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별 수 없으니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심란해 있는 나에게 교장선생님은 말하셨다. 

" 선생님, 토익 감독은 잘 하지 않았어? "

 

기가 막혔다. 학교에선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 

나보고 직접 다음 순번(역시나 나이순)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양해를 구하라고 하였다. 

 

절박한 마음으로 40대 옆부장 선생님 J에게 전화를 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대신 가주실 수 없냐고 울먹거리며 이야기했다.  

선생님 J 는 안타까워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미 수능날 자녀와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해서, 숙소 등을 다 예약해 놓았고 취소할 수 없어서 안된다고 거절하셨다. 

나는 교직 3년차에 교실에서 공황발작이 왔는데, 옆 부서 선생님은 여행을 가셔야했다. 

좌절하는 나에게 선생님 J는 말했다. 

" 선생님, 토익 감독은 잘 하지 않았어? "

 

내가 꾀병이었다고 생각하신 걸까?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셨으면. 아프다는 사람에게 저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땐 안 아팠고, 지금은 아프다고요. 

 

결국은 다른 기간제 선생님께서 나 대신 감독을 가시게 되었다. 

그 선생님도 여행을 계획해 두셨었다. 기간제 교사였기 때문에 거절하기 힘드셨을 거라 생각한다.


 

 

첫 공황발작에 충격 받았던 나는 수능일 다음 주에 일주일간 병가를 냈다. 

 

병가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와보니,

나의 부탁을 거절했던 부장 선생님은 급식실에서 -나의 부탁이 황당했다는 듯- 떠벌려 이야기했고, 

내가 비운 담임 자리를 대신하게 된 부담임 선생님에게 경쾌한 목소리로 -담임을 해보니 어떠냐고 물어보기도 했다고 했다. (그 부담임 선생님은 담임 경력이 없는 신규 선생님이었다.)

아픈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경솔한 행동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선생님 J는 내가 교무실을 비우기만 하면, 어디선가 귀신같이 나타나서 나의 뒷담을 하곤 했다고 한다. 

임용이 되고 나서 그동안 경험한 학교는 ... 참 치사하고 유치한 집단이었다. 

(나를 비롯한 젊은 교사들을 뒤에서 신나게 까대던 선생님 J와 그들의 동료이야기는 차차 기록하도록 하겠다)

 

선생님 J가 우습게 알던 내 증상은, 2년 넘게 사라지지 않고 내 생활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병으로 남아있다. 

 


 

선생님 J를 생각하면 아직도 나는 종종 눈물이 난다. 

그 사람은 한번이라도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 본 적이 있을까? 사무치게 억울하다. 

 

교육청에서 중등교사에게 수능감독을 하도록 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이다. 

나에게 상처를 준 건 수능감독 업무 자체가 아니라, 

수능감독과 관련하여 학교와 선생님 J가 나에게 보인 태도이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 J를 미워하기로,

아니 ... 그 사람 자체가 미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의 옹졸함을 안타까워하기로 했다. 

나는 그래도 마땅하다. 내가 그렇게 정했다. 

 

2023년 수능. 나는 F코드의 '종합병원 진단서'를 제출했다. 

혹자는 겉으로 꽤나 멀쩡해 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내가 수능감독에서 빠진 것에 대해 수근거릴 것이 분명하다. 

근데 어쩌라고. 

난 건강해서 무슨 일이든 문제없이 해내는 사람이고 싶은데. 바꿀래? 

작년 12월말 방학을 앞두고 있던 나는 문득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날은 너무 아픈 날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우울이 나를 덮치고, 자살사고가 시작되었다. 

 

죽고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다. 많다고 해서 쉽게 넘길 만한 증상은 아니다. 

한번의 기도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기도를 하면, 그날 그 사람이 숨을 거둘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 일주일간 병가를 내겠다고 했다. 

이때 내가 정 보강 할 사람이 없으면 나가서 최대한 수업을 해 보겠다고 했는데, 이게 오해를 일으킨 것 같다. 

학교에선 보강을 넣어주는 걸 부담스러워 했고, 쉬어보고 괜찮으면 나와서 수업을 하라고 했다.

- 나중에 알고보니 그건 쉬어보고 나오라는 게 아니라, 쉬고 늦게라도 꼭 나와서 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병가는 이미 결재가 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학교에 알리지 않고 나가지 않은 이상한 사람이 됐다.)

 

물론 억지로 나가려면 나갈 수 있다. 정신병이라는 게 앓아눕는 병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아주 아프다. 내가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상당히 억울하고 불편했다. 

 


 

 

2021년 11월 수능 며칠전, 나에게 공황발작이 일어났다. 

당시 코로나 사태로 원격수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교실에 혼자 앉아 있던 나는 갑자기 온몸에 식은 땀이 나며 손이 벌벌 떨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 증상을 겪었다. 

급하게 교무실에 있던 청심환 같은 생약을 찾아 입에 털어넣었다. 약을 먹고 있는데 옆자리 선생님이 교무실에 들어오셨다. 나는 갑자기 그 순간 그자리에서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고, 딱히 그 선생님을 싫어하지도 않는데 도망가고 싶다니! 

그래서 난 병원을 갔다. 아무래도 내가 아픈 것 같았다. 

 

(내가 아팠던 이유는... 이 글에서 모두 쓰기에는 너무 많아 차차 기록하고자 한다. 

글을 쓰는 목적은 첫째는 해소이고, 둘째는 기록이다. 한 가지 더 바라자면 나와 비슷한 아픔이나 어려움을 겪는 젊은 교사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결국은 한 학기정도는 버텨냈지만 2022학년도 2학기에 휴직을 하게 되었다. 

1년간 휴직을 한 후, 복직하여 보낸 3개월은 꽤나 버거웠다. 

학교는 아직 나에게 무거운 스트레스를 주는 공간이었고, 나는 겨우겨우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치우며 시간을 보냈다. 진료 예약일까지 채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병원에 가길 일쑤였다. 

 

하지만 내가 아픈 걸 사람들은 잘 몰랐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단순하다. 

내가 병색을 가리기위해 화장을 하면 좋아보인다고 하고, 화장을 안하고 가면 아파보인다고 한다.

(정말 너무 아파보여서 화장을 할 때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살쪘다고 좋아보인다고 한다. (항우울제의 가장 흔한 부작용은 체중 증가이다.) 

 


 

 

아직 나는 매일 15알정도의 약을 삼키고, 약 없이는 통증 때문에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는 중증기분장애 환자이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동시에 겪고 있고, 종종 경도의 조증 증상도 나타난다. 2년이 넘게 치료받고 있는데 영 기복이 심해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글을 통해 앞으로 차근차근 

젊은 여성이, 젊은 교사가, 젊은 여교사가 왜 우울증에 걸리는지. 

교직 사회는 젊은 여교사에게 어떤 공간인지 

내가 느낀 바로 기록해보고자 한다. 

 

 

2024년 1월 21일. 우울증에 걸린 20대 여교사의 이야기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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